#로컬산책 여러분~ 신동호 양조사님 글이 책으로 나올 듯 해유~이번달에는 #인천 을 꼬박꼬박 훑어주셨어유~제가 젤 가보고픈 곳은 #일광전구라이트하우스.. 하핫
edited by sasshi(박주민)
들어가며
어릴 적에 경기도 안양과 서울 시흥동에서 살았었다.
둘 다 1호선 수원행 전철역과 지척이었다. 현재 1호선은 충청도까지 연장되었지만, 1990년대만 해도 1호선의 시작점은 인천과 수원이었다. 지하철을 혼자 이용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내게 집으로 돌아올 때는 무조건 ‘수원행’을 확인하라고 신신당부했었다.
반대로 ‘인천행’ 열차는 무조건 타지 말자는 강박이 생겼다. 유독 인천에 갈 이유도 없었지만, 굳이 가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렇게 성인이 되어, 대학교 MT 여행을 떠나면서 마수걸이 인천 방문이 성사되었다.
인천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인천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조수가 밀려들어오듯 다가온 인천의 판도라를 열고 싶었다. 1호선 인천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번 인천여행은 좀 더 남달랐다. 단순히 얼굴만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인천이 담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돌아오고 싶었다.

인천역과 <짜장면 박물관>
구한말 인천항을 통해 외래 문물이 처음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인천은 ‘최초’의 타이틀을 많이 획득했다. 굳이 글 초반에 모두 열거하지 않아도 차차 진행되는 여행 기록 중에 충분히 등장할 것이다. 첫 번째 ‘최초’는 <인천역>이다. 인천 여행의 시작점. 서울에서 출발해 1호선 인천행 열차를 타고 온 이 노선이 대한민국 최초의 철도다.
인천역사 자체가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순백의 2층 구식 건물이라 역사의 진정성이 바로 와닿았다. 광장에 나오면, ‘한국 철도 탄생 역’을 기념하는 기차모형의 대리석 조형물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실제 제작된 열차를 본떠 만든 것인데, 어릴 적 봤던 애니메이션 속 열차와 흡사했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서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에서 연기는 반공에 솟아올랐다.』1899년 9월 19일 자 독립신문에 실린 경인선(인천-노량진 구간) 개통 기사 속 첫 열차를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화통을 삶아 먹었다고 하는 관용적 표현의 실제 상황으로 이해했다. 소박한 인천역 전경과는 달리 석양보다 더 붉은 패루가 공간을 압도하는 길 건너 차이나타운 입구는 상대적으로 화려했다. 누가 봐도 중국이었다.

인천역 인근은 관광지여서 볼거리들이 점조직처럼 몰려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박물관과 전시관은 주제 별로 도보 이동이 가능했다. <짜장면 박물관>이 구미에 당겼다. 짜장면을 먹기 전 의식처럼 박물관을 방문할까도 했지만, 내재된 반대급부에는 관료적 구상으로 기획한 구색 맞추기식의 박물관일 거란 선입견을 이겨내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자본주의적 잣대를 들이댔다. 입장료가 합리적이라 식전 박물관 방문을 결정했다. 기대가 바닥이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흥미로운 정보가 많아 유익했다. 박물관 내부 구성은 다소 구태의연했지만, 짜장면의 역사를 학습하기에는 최고의 장소였다. 짜장면 박물관은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업한 중국음식점인 ‘공화춘’이 사용했던 건물이다.
1983년에 영업을 마치면서 공실이 된 건물을 인천 중구청이 매입해 박물관으로 활용하였다. 전시 마무리 동선에 당시의 공화춘 현판이 전시되었다. 박물관 내부는 공화춘의 증표 같은 유물과 현장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모형들로 채워졌다. 공화춘은 중화민국 건국 시기와 같은 1912년에 개업했다. 그 당시 인천 부둣가는 외국과의 무역이 활발했었고, 쿨리라고 불리는 산둥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편리하고 값싸며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고민했었다. 그렇게 탄생한 요리가 ‘짜장면’이었다.
이후 짜장면은 전국적으로 전파되었고, 대표적인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때 짜장면 가격이 얼마였는 줄 알아?”란 물음은 꼰대들의 전형적인 ‘라떼’ 주제다. 이 박물관의 기록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에는 140원, 1980년대는 350원, 1990년대는 1,300원으로 급등하였고, 2000년도 경제 위기 전후로 3,000원대로 올랐다. 반대로 이 가격대를 알고 있으면, 역으로 상대방에게 질문해 나이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중국에서 시설물이나 무덤, 공원 따위의 입구에 세우는 구조물을 패루라고 한다. 차이나타운의 입구에서도 볼 수 있다. 중국 전통의 붉은색과 황금색의 조화가 눈길을 끈다. 차이나타운 골목에 즐비한 중국 음식점의 외관도 다를 바가 없이 화려함 그 자체였다.
세상에 맛집의 개념이 없었던 고등학교 시절, 무조건 외관이 크고 휘황찬란한 식당에 이끌려 들어가 그 음식에 설득당하고 나왔었다. 물론 그 시절 나의 미식관은 정립되어 있지 않았기에 허탈함 마저 몰랐었다. 성인이 되고 일행 중 누군가의 경험을 믿고 들어갔던 식당은 되레 그 친구가 맛이 변했다며 초장에 판을 깨버렸다. 오롯이 혼자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사전 조사 끝에 선택한 몇 개의 중국 음식점 중에 현장답사로 한 군데를 선정하기로 했다.
<신승반점>과 <인천 브루어리>
차이나타운 메인 거리에서 세상 관종처럼 군림하는 음식점들을 제치고 들어선 식당은 <신승반점>이었다. 솔직히 해당 정보가 없었다면 이 골목까지 나 스스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원조 짜장면 집’인 공화춘의 논란은 있지만, 신승반점은 예전 공화춘을 운영했던 우희광의 외손녀가 운영하는 건 팩트였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유니짜장’. 잘게 간 고기를 밥 위에 얹어 그 위에 간장소스를 뿌려 자주 먹었던 기억 때문인지, 유니짜장은 처음부터 내게 소울푸드였다.
면 위에 오이채와 계란 프라이가 얹어진 유니짜장이 나왔다. 짜장 소스는 입자가 균일하고 점도가 적당해서 면으로 쏟을 때 특유의 쾌감이 발현되었다. 면을 다 먹어도 짜장 소스가 충분히 남아 밥을 말아먹는 걸로 마무리했다. 남은 소스를 밥 없이 전부 긁어먹었다면 여행 중에 물만 찾게 되었을 것이다.

차이나타운이 속한 개항동을 런던 북부 라임하우스라고 치면, 결대로 나 있는 길을 관성에 이끌려 온 해안동은 쇼디치나 해크니 정도와 비유할 수 있었다. 런던 해크니에 방문했던 수제 맥주 양조장들이 유독 페인트나 그라피티 아트로 외벽을 칠했던 기억 때문일 것이다. 흰색과 파란색이 병치된 외벽은 라거 맥주의 시원함을 말해주듯, 개항로 라거가 <인천 브루어리>의 시그니처 맥주다.
맥주에 새긴 상호명 폰트와 인쇄한 포스터 모두 기획이 파격적이다. 포스터 속 남성에서 야수성을 끌어냈고, 병에 새간 폰트에서 진취적 기상이 표현됐다. 개항로 맥주는 개항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탄생한 맥주로 인천 개항로 상권의 부활을 위해 인천 지역에서만 판매, 음용할 수 있었다. 맥주의 플레이버는 여느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와는 달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보편성에 방점을 찍었다.
브루어리에 들어가 맥주 한 병을 사서 나왔다. 입구 앞 간이 테이블에 앉아 거리뷰를 안주 삼아 병째 기울였다. 목구멍이 살짝 타들어갈 정도의 청량감이 노곤한 자아를 깨웠다. 이것이 인천의 맛이구나. 바로 옆 신포시장의 닭강정을 부르는 맛이기도 했다.

<신포국제시장>
“가서 닭강정 사 와!” 인천에 간다고 밝히면 습관적으로 듣는 말이다. 마치 잘 다녀오라는 뜻의 인사말처럼 들릴 때도 있었다. 특수 구전마케팅이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는 사회적 분석도 가능하다. 그만큼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을 대표하는 시장이다.
인천은 개항장이어서 약 100년 전부터 다국적 상인들이 섞여 지냈다. 신포시장은 일본인들에게 채소를 팔던 중국인 점포들이 모여 형성된 상권이다. 신포시장에 ‘국제’가 붙은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신포국제시장의 히트 상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먹거리 상점이 벨트를 이뤄 대부분의 취향을 섭렵하였기 때문에 시장 속 손님들의 성별과 연령층은 넓은 편이다.
그중에 신포국제시장 양옆 상권은 항상 인산인해다. 마치 꼬투리가 튀어나온 김밥의 원형처럼 신포시장 출입구 앞은 가장 웨이팅 손님이 많았다. 서편 끝에는 ‘산동 만두 공갈빵’이, 동편 끝에는 ‘신포 닭강정’이 해당 상점이다. 시장을 찾아온 모임 구성원들이 구매를 희망하는 가게 앞에서 전략적으로 나눠 기다리는 게 이 시장에서 통하는 소비자들의 사회적 합의다.
신포국제시장은 쫄면의 태동을 알렸던 곳이기도 하다. 40년 전통의 순댓국, 막 찜통에서 나온 찐빵, 시장 거리에 나온 팥죽뿐만 아니라 각종 부재료로 만든 엿, 마카롱, 에그 타르트와 같은 디저트까지 라인업이 탄탄하다. 약육강식의 구조가 아닌 서로 성장하여 공간의 시너지를 나눠 갖는 형태의 장터 모습이었다.

동인천 삼치거리 : <인천집>
종로 피맛골은 삼치구이를 처음 영접하게 만들어준 곳이다. 특히 지갑이 얇은 대학시절에 모임 장소로 피맛골은 이해타산이 잘 맞아떨어졌다. 좁다란 골목 사이 허름한 술집으로 들어가 생선구이를 주문하면 불특정 생선들이 서로 엉긴 채 구워져 나왔다. 그중 가장 두툼한 생선은 동료들 사이에서도 큰 인기였다. 그 생선이 삼치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테이블에 삼치가 올라오면 늘 안도감이 들었다.
종로의 피맛골은 지역 정비사업으로 사라졌지만, 비슷한 배경의 거리가 인천에 존재했다. <동인천 삼치거리>는 인천의 오래된 명물거리다. 약 40여 년 전 한 노부부가 연탄 불로 구운 삼치와 지역 막걸리를 제공하면서 이 거리가 유래되었다. ‘인하의 집’이나 ‘인천집’은 삼치거리의 원조격으로 불리는 집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처음 추천받은 곳이라 다시 와도 <인천집>으로 향했다.
안주의 카테고리는 폭넓어졌어도 주문 방식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삼치구이와 소성주. 원래 생선구이에는 ‘소주주의’지만, 여기는 막걸리와의 페어링이 옳다고 본다. 동시대적 물가 상승을 피해 갈 수는 없지만, 이 골목은 전체 상승률에 비껴간 가격대다. ‘인천집’은 연탄구이가 아닌 황토 화덕 속에서 생선을 굽는다. 짭짤한 생선구이와 달달한 막걸리는 서로 ‘단짠 조화’를 이뤘다. 안주와의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고 막걸리 주문량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루비살롱 클럽>
200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라는 보물 같은 한국 다큐멘터리를 만났다. 이 다큐는 인천 루비살롱 클럽의 출범과 그 클럽을 근거지로 삼은 성격 다른 두 밴드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이다. 직접 출연한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드러머인 백승화가 메가폰을 잡았다.
영상 내내 등장하는 배경은 부평 모텔촌에 있는 루비살롱 클럽이었다. 라이브 클럽이자 인디 레이블이었던 루비살롱은 수많은 락스타를 탄생시키면서 인천 락문화에 큰 기여를 했다. 세월이 흘러 거처를 부평에서 신포동으로 옮겼다.
1965년부터 선원들이 묵었다가 1990년대에 경쟁에 밀려 폐업하였던 인천여관을 인수했다. 여관의 형태와 쓸모를 최대한 살려 카페와 전시공간 그리고 음악감상실로 꾸몄다. 그 당시 사용했던 욕실과 화장실도 인테리어로 십분 활용했다.
음악 레이블 회사답게 곳곳에 음악적 오브제들이 넘쳐났다. 시간의 흔적을 가늠할 수 없는 레트로한 소품들도 빈티지란 옷을 입고 운치 있게 놓여있었다. 특히 주인장이 BTS 팬인지 적지 않은 관련 소품과 사진들이 해당 팬들을 끌어오게 만들었다.

<송월동 동화마을>
인천 개항로 맥주의 포스터 모델을 떠올려보자.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은 한번보고 절대 잊을 수 없는 날것의 포스였다. 포스터 속 주인공은 70대의 최남선 씨. 어릴 적부터 그림을 배워, 생애 많은 부분을 극장 간판을 그리는데 보냈었다. 이후 개항로에서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놓지 않았다.
2017년에는 <송월동 동화마을>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었다. 송월동 동화마을은 이름 그대로 동화 같은 마을이다. 개항 이후 송월동은 외국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면서 부촌이 되었지만, 이들이 빠져나가자 슬럼화되어 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2013년부터 주거환경 조성 사업이 진행되면서 지금의 동화마을이 탄생하였다.
자유 공원에서 내리막길로 내려와 북성동 짜장면 거리 사이에 송월동 동화마을이 위치해 있다. 송월 장로교회가 있는 언덕 가장 위에서 동화마을을 내려다봤다. 마치 서울 남산공원에서 소월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해방촌 꼭대기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우리가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던, 심지어 성인이 되어 보았던 유명 세계명작동화를 주제로 마을을 덧입혔다,
1차원적인 벽화 그림부터 입체감 있게 표현한 조형물까지 여느 벽화마을보다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업이었다. 골목 구석구석까지 촬영 포인트가 많아서 시간이 지날수록 동심의 블랙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감성 터지는 골목을 발견할 때마다 같은 연인과 마주쳤다. 별로 개의치 않았다.

<개항로 통닭>
‘개항로’는 인천이 만든 브랜드인 줄 알았는데, 실제 존재하는 길 이름이었다. 생명력이 다 한 오래된 건물을 노포라는 콘텐츠로 채우는 ‘개항로 프로젝트’를 2017년부터 진행하였다. 단순히 카페, 술집의 형태로 사업을 도모하는 게 아니라 가게마다의 콘셉트를 입히는 작업을 신중하게 진행하였다. 개항로 거리의 끄트머리에는 그 성공사례로 꼽는 <개항로통닭>이 있었다.
개항로통닭의 콘셉트는 ‘추억의 어린 시절’이었다. 추억이 방울방울 하는 옛 시절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이 장면들을 회상하며 뉴트로 통닭집을 디자인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지은 건물은 무늬만 빈티지로 포장한 건물과는 확실히 달랐다. 특이한 건 약 40년 전 이 주변은 전기구이 통닭 주점들이 즐비했었다고 한다. 실제 이 건물에서도 통닭을 판매했었다는 목격자들이 개항로통닭을 찾는다고 한다.
통닭 하면 따라 나오는 미식 연관검색어가 ‘맥주’가 아니겠는가. 세상 누구나 아는 대기업 맥주도 판매하지만, 개항로가 낳은 ‘개항로맥주’의 매출이 높았다. ‘로컬 상권에서 파는 로컬 술’의 법칙은 술빚는 양조사인 나에게도 꿈이자 이뤄야 할 과제인데, 개항로 프로젝트를 보니 새삼 부러웠다.
아치형 개항로통닭 간판 골목으로 들어가면, 밖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숨겨진 공간이 펼쳐진다. 공간을 기획한 목적에 맞게 남녀노소가 거리감 없이 출입하였다.

<브라운핸즈>
사전 정보가 없는 리뉴얼된 건물 앞에서 탐정놀이를 할 때가 있다. 건물 외관을 보고 이전의 역사를 추리하는 게 1단계다. <브라운 핸즈> 건물은 겨자색 벽돌 타일로 연식을 추측하며 이전 기억을 끄집어냈다. 바로 감이 오지 않을 때는 국과수 직원인 양 사소한 흔적과 의심이 가는 오브제에 의미를 부여한다.
모든 걸 종합해 볼 때, 상업적 목적보다는 관공서나 사무실로 사용했던 건물로 1차 결론을 내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없애지 않고 계속 품고 있는 인테리어나 소품들을 관찰하는 게 2단계다. 얼마 살펴보지 않아도 이 건물이 병원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흰색 블라인드가 내려진 곳은 진료 접수실이었다.
색이 바란 캐비닛 안에는 외국어가 잔뜩 쓰여 있는 예전 약품들과 얼굴이 그려진 인체 해부도 그림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걸로 보아 여기는 이비인후과였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1층은 오롯이 주문을 받는 공간이며, 2~4층에 좌석이 마련되었다. 위층으로 올라가니 진찰실 푯말도 여전히 붙어 있었고, 그 시절 사용했던 진료차트도 눈에 들어왔다.
음료를 주문하면 쿠폰을 나눠 줬는데, 쿠폰을 찍어주는 도장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발견했다. 10잔을 마시면 1잔을 무료로 제공하는 제도는 여느 카페와 다를 바가 없었다. 특별함은 도장 안에 있었다. 예전 병원에서 사용했을 법한 레트로 도장은 1번부터 10번까지 도안된 문양이 달라서, 차례로 종이에 찍을 때마다 다른 모양이 찍혀 10번이 찍힐 때 그림이 완성되었다.
카페는 전체적으로 플랜테리어를 표방하여, 공간 곳곳마다 초록색 식물이 반려 식물처럼 손님들을 맞이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었던 건물이어서 생명력을 불어넣는 차원에서 기획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일광전구 라이트 하우스>
야경 맛집 하면 으레 확 트인 야외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실외가 아닌 또 다른 의미에서 야경이 아름다운 건물을 소개하려고 한다. 해가 지면 더 화려하지만, 모든 시간대 ‘빛’나는 카페가 있다.
<일광전구 라이트 하우스>는 국내 대표 백열전구 브랜드인 일광전구에서 운영하는 카페 겸 쇼룸이다. 과거 산부인과 건물로 이용했던 발자취를 카페로 개조한 후에도 찾아볼 수 있었다. 백열전구 모양새로 제작한 출입문의 문고리를 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굿즈 진열대에는 스탠드 상품들이 자체 발광하며 카페의 정체성을 보여줬다. 카페 중앙에는 현대판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가 상영되었다.
처음에는 대형 설치 예술품인 줄 알았는데, 백열전구를 찍어내는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멈춰버린 시간이 아쉬운 걸까. 창문 외곽에 일정 간격으로 설치된 알전구는 해가 지면서 존재감을 발현했다. 빛바랜 과거를 여러 색깔의 빛으로 소생해 보려는 오브제 같았다.
병원 건물 뒤편에는 예전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을 별관 좌석으로 활용하였다. 본관이 화려함을 추구했다면 별관은 다소 안온한 개화기 가정집 분위기를 연출했다. 병원으로 사용됐던 기운이 남아서 그럴까.
우울했던 마음이 여러 줄기 빛을 받아 치유되는 것 같았다. 그것이 플라시보 효과일지라도 괜찮아. 아, 여기 커피 맛도 빛났다. 너무 빛나는 게 많아 꼬리표에 언급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케이슨24>
인천 8번 버스가 종점에 도착했다. 인천대학교 공과대학 정류장이라 남아있는 승객들은 대부분 재학 중인 학생들로 보였다. 주저 없이 교정 안으로 들어가는 학생들이 사라지고, 이곳이 낯선 한 사람만이 정류장에 서 있었다. 버스가 떠나고 고요함이 어색함을 밀어낼 때, 지도 앱이 표시한 대로 좀 더 걸어갔다.
대학교 옆 바닷가, 그 앞에 펼쳐진 공원. 파도와 바람 소리가 점거한 공원 안에 오늘의 목적지인 복합문화공간 <케이슨24>가 모습을 드러냈다. 송도 국제도시에서 문화와 예술을 교류하고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도록 2017년도에 아트 컬처 플랫폼의 형태로 오픈한 곳이다.
이 공간은 과거 영종도 국제공항과 송도 국제도시를 잇는 인천대교가 지어질 때 필요한 자재를 쌓아두었던 곳이었다. 케이슨24란 작명도 인천대교 공사와 관련해 따왔다. 교량의 기초 부분을 다질 때 사용한 케이슨 공법과 송도의 스물네 번째 공원인 솔찬공원의 연혁을 착안해서 지었다고 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콘셉트로 건축물이 지어졌다. 이 공간의 지하에는 갤러리가 운영 중이며, 지상으로는 카페, 컬쳐 뮤지엄, 야외공연장, 편의점, 레스토랑, 루프탑 전망대로 구성되었다. 둘러봐도 주변에 다른 상업시설이 없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일정 시간을 보내기에 충분한 콘텐츠가 내장되어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는 수평선과 다른 작업라인이 겹쳐 보였다, 포클레인이 오랜 시간 그어놓은 선. 독특한 바다 화폭도 이곳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 이유였다.

<송도 한옥마을>
이화여대 앞에 ‘가마빈’이란 카페가 있었다. 원두를 가마솥으로 볶는 카페였다. 이 카페에 손님으로 갔다가 직원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를 퇴근하고 저녁에 다시 출근하면서까지 카페 일을 했던 건 사장님의 커피 철학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철학을 모두 흡수하지 못한 채 일을 그만뒀지만, 가끔 놀러 가며 인연을 끊지 않았다. 작은 아지트처럼 운영했던 카페는 여러 가지 연유로 2015년에 송도 센트럴파크로 옮겼다.
그렇게 나의 첫 송도 여정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송도 국제도시가 자리를 잡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미지의 도시였다. 송도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G타워 전망대에서도 완공된 도시보다는 황무지의 비율이 훨씬 높았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닮은 이 공원은 바닷물을 정화해 공급하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수공원이다.
그래서 호수 안에는 바다생물들이 살고 있었다. 국제도시답게 호수 주변은 높은 마천루들이 둘러쌌다. 복합문화 공간인 ‘트라이볼’은 도자기 사발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을 모티브로 지었다. 송도의 작은 동대문디지털플라자(DDP)란 별명을 붙어줬다. 즐비한 현대건축물 사이로 대한민국 명장이 지은 송도 한옥마을이 호수 한가운데에 촌을 이뤘다.
한옥 할리스 카페는 반드시 들러 휴식을 취하는 코스다. 없던 도시가 만들어질 때는 인공적 로컬이라 규정지으며 편치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었다. 하지만 연고 없이 뿌리내리는 도시의 성장을 바라본다는 관점에서 현재 송도 도시는 시민들에게 많은 표를 받았다. 어느새 여행자인 나도 이 세계관에 응원을 보태고 있으니 말이다.

<코스모40>
인천 중구에서 서구로 넘어갔다. 관광자원이 많은 중구에 비해 서구는 박스형 도로 안이 공업단지로 채워졌다. 가좌 지역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주거지역이 다소 분포되었다. 지금 찾아갈 곳은 가좌동에 위치한 카페 <코스모40>이다. 아파트 단지에서 길을 건너기 전부터 느낌이 왔다.
단순 콘크리트가 아닌 예술적 복선이 깔린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신호가 바뀌어 횡단보도를 건넜다. 낯선 곳을 재빨리 인지하려고 적극적 관찰 모드로 시선을 훑는 와중에 ‘가좌 플레이 그라운드’를 소개하는 간판 앞에서 멈췄다.
쭉 읽어보니 인천 서구에서 진행하는 마을미술 프로젝트였다. 이곳이 산업단지와 주거지역을 경계로 만든 소규모 녹지공원인데, 환경적 완충지역으로 분절되어 있다가 현재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놀이문화 공간이 되었다.
여기부터 카페로 가는 길은 예술적 터치로 톤 다운되어 산책길로도 일품이었다. 이전에는 공장들이 분주히 돌아가던 곳이었다. 차츰 사람들이 나가고 남은 것은 폐건물들. 보기 안 좋게 남은 공장 건물을 활용한 도시재생에 한창이었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건물은 코스모40이다.
대규모 코스모 공장단지가 울산으로 이전하면서 1968년부터 가동하던 코스모 화학 단지 공장도 할 일을 잃었다. 그렇게 방치된 공장 건물을 2018년에 한 커피 그룹과 현지인이 인수하면서 조형미를 갖추기 시작했다. 코스모 화학회사의 40번째 공장 건물이란 뜻을 살려 카페명을 지었다. 1층은 전시하는 공간, 2층은 사무실, 3층은 손님들이 주로 애용하는 카페 라운지, 4층은 커뮤니티 홀로 이뤄져 있었다.
3층의 카페 라운지는 대형 통유리를 통해 전달되는 자연광이 조명이라면, 1층과 4층은 철제 난간을 살린 오픈된 공간으로 최대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특이하게 탁구대 몇 대를 들여 ‘코스모배 탁구 대회’ 예선이 진행 중이다. 버려진 공장을 활용한 문화복합공간이 많아지는 요즘, 코스모40은 차별된 아이템과 조형미로 손님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충족해 주고 있었다.

<틈 문화창작지대>
2017년 12월 한파를 이겨내며 매주 두 번씩 오고 갔었던 곳, 인천 시민공원 역 사거리에 위치한 <틈 문화창작지대>란 공간이다. 그 당시 독립출판이란 콘텐츠를 알고 시작했지만, 출판을 제대로 배워온 적이 없던 차에 해당 기관에서 독립출판의 A~Z를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틈 문화창작지대는 다양한 창작활동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다. 독립출판뿐만 아니라 동영상 촬영 및 편집, 디자인, UI/UX 기획, 이모티콘 제작 등 문화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는 수업들이 다양했었다. 문체부와 인천시의 주최로 운영되다 보니 간단한 면접을 거친 후 무료로 수강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 면접 과정을 거쳐 <추워도 독립출판>이란 수업을 듣고, 수료한 후 실제 여행 서적을 출간하였다. 당시 수업을 담당했던 인천 북극서점의 대표님들과는 인연을 계속 이어가, 내 특기를 살려 진행한 ‘책방에서 막걸리 빚기’ 클래스도 시도했었다.
2014년부터 이 기관을 거쳐 간 창작자가 엄청나게 많아 인천 문화콘텐츠 제작의 요람이 되었다. 오랜만에 수업 듣고 먹었던 평양냉면이 생각나서 지나쳤다. 여전히 파란색 컨테이너 건물은 위풍당당했다.

<변가네 옹진 냉면>과 <명인콩국수>
인천 주안동 옛 시민회관 사거리에서 주안 2동 방향으로 향했다. 여전히 주택 정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1977년부터 백령도식 냉면을 제공하는 <변가네 옹진 냉면>이 주택가 사이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인천 냉면은 크게 ‘백령도식’ 냉면과 ‘화평동식’ 냉면으로 나뉜다. 화평동식 냉면은 한때 전국적으로 열풍을 불었던 세숫대야 냉면의 전형이다. 맛의 특징보다는 양으로 승부를 보는 방식인데, 명맥을 잇는 냉면집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변가네 옹진 냉면은 함흥냉면과도 결이 다르다.
면의 메밀 함량이 높아 치아로 끊기 좋은 백령도식 냉면집이다. 이름 그대로 백령도 사람들이 인천으로 나와 정착한 냉면의 일종이며, 넓게 보면 함흥냉면과 평양냉면의 중간 형태의 식감이다. 식전에 나오는 국물은 누룽지처럼 구수했다. 면을 삶은 면수를 제공하는데, 그 맛이 담백하고 슴슴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콩 껍질 맛은 메밀껍질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특유의 고소한 맛이 여느 냉면집과는 확연히 달랐다. 먼저 나온 수육은 육질이 순하고 잡내를 읽을 수 없이 잘 삶아 나왔다. 배추김치와 궁합이 좋았다. 드디어 나온 물냉면. 육수는 꽤 맑은 편이었다.
식전 육수에서 경험했던 구수한 맛이 좀 옅어지면서 생강 향과 달달한 맛이 올라왔다. 백령도식 냉면 육수는 까나리 액젓으로 간을 맞춘다. 생강의 알싸함과 만나 단맛이 만들어졌다. 면의 탄성이 낮아서 가위 없이도 먹기 편했다.

면을 먹고 다시 면을 얹었다. 콩국수 전국투어에 박차를 가할 정도로 콩국수에 진심인 사람이다. 콩국수는 계절음식이라서 매년 여름을 기다렸다. 면의 고장인 인천에서도 고집스럽게 콩국수만을 판매하는 식당을 찾아갔다. 동춘동 상가 2층에서 영업 중인 <명인콩국수>는 옛날 재래식 맷돌로 간 콩 국물로 만 승부하는 집이다. 계단 사이로 어이가 없는(?) 현무암 맷돌 모형이 전시되었다.
메뉴판에 적힌 메뉴는 콩국수뿐이었다(참고로 겨울(9~4월)에는 팥칼국수와 새알 팥죽도 판매). 오이채나 깨조차 없는 순백의 콩국수가 등장했다. 크리미한 콩 국물이 가늠되었다. 젓가락에 가해지는 저항력이 높았다. 까르보나라 크림 파스타처럼 꾸덕꾸덕한 콩 국물이 이 식당의 스타일이었다. 소금과 흑설탕 중에 주저 없이 소금을 뿌렸다. 전라도에서는 설탕을 붓는다는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면은 라면 굵기 정도라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아쉬운 건 김치였다. 콩 국물이 권태로워질 때, 상쇄할 수 있는 진한 김치가 필요한데 너무 평범했다. 눈에 번뜩일만한 콩국수는 아니어도 인천 상권에서 40년 넘게 장사해온 업력이 믿어지는 한 그릇이었다.

‘탁브루’의 ‘탁!(TAAK!)
인천의 정체성을 담은 맥주가 개항로 맥주라면, 인천에서 나는 재료로 인천을 상징하는 막걸리를 빚는 곳도 찾아가 봤다. 인천 부평구에 위치한 양조장 <탁브루>. 최근에 인천 지역 특산주 면허가 나온 신생 양조장이다. ‘탁브루’의 ‘탁!(TAAK!)’은 보통 우리가 막걸리를 혼자보다는 여럿이 즐겁게 마시는데, 건배할 때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와 마신 잔을 테이블에 놓는 소리를 표현하는 말이다.
동시에 탁주의 ‘탁’도 의미하며, ‘브루’는 브루어리로서 양조장을 뜻한다. 탁브루는 ‘인천 강화섬 쌀’을 활용한 막걸리를 출시 중이다. 현재 출시된 ‘탁132 오리지널’을 비롯해 ‘탁112 클래식’, ‘탁 102’ 등이 연이어 릴리즈할 예정이다.
상호에 적힌 숫자는 재료 간의 밸런스를 표현한다고 한다. 결국 인천 강화섬 쌀이라는 좋은 재료를 바탕으로 최적의 발효와 숙성 밸런스를 개발해 내는 게 이 양조장의 정체성이었다. 술을 빚을 때 첨가하는 물도 수돗물이 아닌 좀 더 위생적인 생수를 활용하고 있었다.
양조장에 푸른 생수통이 무척 많았다. 흔히 막걸리를 빚는 사람은 나이가 많을 거란 선입견이 있는데, 탁브루의 대표는 의외로 30대 청년이었다. 생산뿐만 아니라 디자인, 브랜딩, 마케팅 측면에도 다양한 시도를 꿈꾸고 있었다. 인천을 대표하는 막걸리로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야구는 국민 스포츠다. 나도 서울 연고지 팀의 팬이다. 여전히 부적처럼 지갑 속에 ‘OB 베어스 어린이 회원증’을 간직하고 있다. 부모님께 받은 초등학교 입학 선물이다. 그렇게 미우나 고우나 두산 베어스 팀을 응원 중이다. 야구는 개인 취미를 넘어 인간관계에도 관여해 왔다. 가마빈 카페 사장님과도 주된 대화 주제가 야구였다. 사장님은 10년 이상 사회인 야구단 감독을 역임하셨다.
야구 마니아인 카페 단골 학생까지 등장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수다 삼매경에 빠졌었다. 사장님은 인천 분이라서 오래된 인천 야구팀 팬이었고, 단골 친구도 같은 팀을 응원했었다. 결국 말로 하던 야구는 ‘이화 플레이걸스’라는 대한민국 최초 여대 야구단 창단까지 이어졌다. ‘인천 야구인들의 결의’로 결성된 야구단은 현재까지도 운영 중이다(운영진과 선수들은 세대교체되었다.).
당시 인천 야구팀은 ‘SK 와이번스’였지만, 현재는 ‘신세계’가 인천야구장의 주인이다. 구단의 적극적인 투자와 구단주의 광폭행보로 브랜드 가치는 짧은 시간에 성장했으며, 시즌 성적도 정비례되면서 관련 팬층도 두터워졌다. 인천은 개항 이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야구가 들어온 도시다. 요즘 인천 SSG 랜더스 필드 분위기만 보면 인천이 야구 본고장으로서의 명성을 빠른 시일 내에 되찾을 것 같다.

‘모든 길은 인천으로 통한다’란 말이 있다. 세계 어디든지 떠나고 우리나라로 처음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닿는 첫 발이자, 외국으로 나서는 마지막 발을 인천에서 찍는다.
약 100년 전도 그랬고, 현재의 인천도 만남과 떠남의 설렘과 아쉬움이 공존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지나친 곳에는 융합된 문화가 발달한다. 인천은 일찍이 해외 문물을 받아들여 다양한 ‘최초’의 타이틀로 역사의 시작점을 기록했던 곳이다. 그 명맥을 역으로 풀어가는 묘미도 있다. 인천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실례다. 열거식으로 정리할 의무가 있다. 이 글에 소개된 인천은 정말 빙산의 일각이다.
인천역에서 시작된 여행은 예상대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파면 팔수록 인천 여행의 마스터플랜이 수정, 확대되어 기존 기조를 놓아버렸다. 하지만 서울과 인천 간의 심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점점 날 끌어당기고 있다. 다음 인천 여행이 벌써 설레는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