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젤 로맨틱한 보건소가 있는 곳 #남해.#독일마을 과 #미국마을 과 #남해스떼 가 있는 작은 지구, 남해.멋진 수제맥주와 막걸리가 공존하는 곳, 남해. 이렇게 알알이 스토리 가득한 곳일 줄은 미처 몰랐어요..!
세밑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다. 해돋이의 찬란함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인파에 이미 지치기 마련이다. 매년 12월 31일은 소박하게 보낸다. 목욕재계하고 저녁 즈음 집 근처 한강으로 나선다. 해가 지는 방향으로 앉아 노을의 기를 받아, 내년 버킷리스트를 메모장에 정리한다. 이 정도가 한 해를 정리하는 나만의 루틴이었다.
2016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아는 동생에게서 신박한 연말 모임 제안을 받았다. 매년 남해 다랭이 마을에서 새해 해돋이를 보는데, 올해는 그 멤버에 나도 합류하라는 의견이었다. 모두 그 친구의 지인이었지만, 나의 적응력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다는 게 호출한 이유였다.
남해에서 일출을 가장 가까이 편하게 볼 수 있는 곳에서 한 해의 포문을 열었다. 이를 계기로 적어도 2년마다 새해에 남해를 찾았다. 내게 새해 첫 공연은 남해 해돋이인 셈이다.

새해 해돋이 공연을 좋은 자리에서 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다. <소치 펜션>은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한 숙소였다. 남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가장 가깝고 찬란하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에서 연초까지 ‘2년간’ 이 숙소에서 보내려면, 치열한 경쟁률을 이겨내야 한다. 최소 한 달 전부터 예약 전쟁이 시작된다.
펜션이라 하기에는 조금 연식이 있어 민박처럼 보였다. 숙소를 끼고돌면 남해바다 최고의 스크린이 펼쳐진다. 잘 정돈된 정원부터 감탄사가 나왔다. 가방은 대충 숙소 안에 던져 놓고 몸은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나무 데크로 만든 야외 테라스에 제멋대로 몸을 얹었다. 남해바다가 틀어놓은 다큐멘터리에 눈을 떼지 못해 다음 일정을 잊어버렸다. 비탈진 경사에 조성된 계단식 논은 여느 해안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미를 자아냈다. 다랭이 마을에서 구경하는 해돋이가 장관인 이유다.
한겨울인데도 논에 푸른빛이 돌았다. 마늘 종자를 심어서 온통 매운 향이 진동했다. 혹자는 다랭이 마을을 이탈리아 남부 도시와 연결시킨다. 특히, 코로나 시대였던 지난 몇 년 동안 다랭이마을은 유럽을 대신했을 것이다. 이 다큐멘터리 전경에 술이 빠질 수 없어서 방금 사 온 다랭이 마을 막걸리를 꺼내 남해 바다 배경에 끼워 넣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바다를 VIP 좌석에서 바라보니 넓은 시야에 가둘 수 있는 바다가 한이 없도다.

남해 서면에 도착했다. 하늘이 칠흑 같아서 주변을 살펴볼 겨를이 없어 숙소 입구를 찾았다. 배정받은 방에 들어갔다. 중앙 등을 켰다. 불현듯 바깥에 미련이 남아 베란다로 나왔다. 답답한 마천루 하나 없는 탁 트인 전망이었다. 곳곳에 켜져 있는 가로등으로 중형 크기의 공원임을 확인하였다. 전망에 좀 더 집중하려고 방안의 조도를 없앴다. 하늘에는 북두칠성이, 호텔 앞은 구획별 야외 경기장들이 기어코 자취를 드러냈다.
다음 날 오전, 전체 모습이 궁금해 커튼을 젖혔다. 공원 사이사이로 어두운 밤 내밀하게 숨겨뒀던 야외 운동 코트와 필드가 드러났다. 공원 안에는 농구 코트가, 11시 방향에는 다이아몬드 형상의 잔디가 깔린 야구장이 저 멀리 바다 아래 배경에 깔렸다. 지금 묵고 있는 <남해스포츠파크호텔>은 이름 그대로 각종 스포츠 전지훈련장으로 유명하다. 실내외 경기장과 트레이닝 센터가 있었다.
1층 로비에는 스포츠 스타들의 사진이나 사인볼이 전시되어 있었다. 지역 프로 팀의 전지훈련지로도 자주 애용되는 곳이다. 선수들이 이용하는 시설인 만큼 산책 및 오전 운동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숙소였다.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일상의 루틴을 누려봤다. 터놓은 길대로 걸었다. 북향의 서상 마을과 가까워지니 산책 나온 강아지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서상 항구가 나올 때 즈음 지도 앱을 꺼냈다. 마을 진입 전에 동선을 구상했다.

남해대교의 축소판인 붉은 아치형 다리를 건너자 한 주택이 고즈넉한 공간을 독차지했다. 홀로 유럽 내음을 발하고 있는 큰 저택의 정체는 <서면보건지소>. 내가 본 가장 로맨틱한 보건소였다. 몇 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관심을 표명한 짧은 의식이다.
계속해서 소하천을 따라 내어놓은 산책로가 이어졌다. 바다 곁 작은 숲 속인 <서상 숲>과의 조우가 이뤄졌다. 한동안 내리받았던 햇살을 잠시 거둘 시간이 되었다. 한 옥타브 정도의 선율로도 편안해지는 치유를 서상 숲에서는 충분히 가능했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조금 더 걸음을 더하면 마을의 움직임이 보일 듯했다. 자동차가 다니는 대로로 갈아타 본격적인 마을 산책이 시작되었다.

일상을 밖에서 영위하는 주민분들 외에 외지인은 보이지 않았다. 서상 삼거리에서 가고 싶은 장소가 좌측에 몰려 있었다. 서면 우체국 앞에서 멈췄다. 생각지도 않은 노다지를 발견했다. <서상 양조장>은 누가 봐도 마을의 시작부터 지탱했을 법한 외관이었다. 문이 열려있어서 대뜸 입장했다. 익숙한 양조도구와 시설이 반가워 흥분했다.
그런데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더 이상 외치면 민폐일 것 같아 조용히 둘러보기로 했다. 아버지가 건강이 좋지 않아 더 이상 양조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포항제철 엘리트였던 아들이자 남편분(이정언)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가업을 물려받게 되었다. 현재까지 55년간 이정언, 곽명선 사장님 부부가 이 양조장을 운영하시는데, 최근 항암치료 중이라 몇 달째 술을 빚지 못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쉽고 착잡했다. 열린 문을 닫고 나왔다.

이 작은 동네에 정말로 있을까 의문을 품었던 동네 책방이 나타났다. 책방 <스테이 위드 북>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새로운 순풍 같았다. 책과 함께 잠시 머물다 가시라는 주인장의 마음이 책방 작명과 잘 맞아떨어졌다. 김밥을 파는 특이한 책방이었는데, 지금은 사정상 판매를 하지 않았다. 대신 음료와 맥주는 여전히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향해 터놓은 길 끄트머리 즈음에 오로지 물회만 판매하는 <부산횟집>이 나왔다. 물회 마니아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는 남해의 맛집이다. 대부분이 산지를 이뤄 산간 곡저에 흐르는 하천을 따라 형성한 작은 마을인 서상 마을. 품은 이야기만큼은 그리 작지 않아 더 듣고 싶었다.

남해스포츠파크호텔 북쪽이 서상 마을이라면, 남쪽은 장항 마을이었다. 서상 마을은 바다를 숨기고 있는데 반해, 장항마을 쪽은 시원하게 바다부터 보였다. 장항마을 진입로가 공사 중이라 다소 어수선했다. 흙먼지가 날리는 모래 노변을 지나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에 몸을 숨겼다. 고개만 내밀었을 때 바라는 건 사진 한 장이었는데, 지인들은 짙은 청색 빛에 물든 장항 해변에 마음을 돌렸다.
장항 해변은 남북으로 뻗은 몽돌해변이다. 높은 공기 해상도는 맞은편 여수반도까지 가감 없이 보여줬다. 그믐달 모양으로 수놓은 장항 해변 위로 눈 화장하듯 장항 숲이 덮여 있다. 소나무 방풍림이 울창해 낮에는 해를 피할 수 있는 쉼을 제공하고, 밤에는 고요한 바다를 감상하는데 훌륭한 소품이 되어줬다. 호젓한 바다와 울창한 수풀림이 있으니 인파가 몰릴 수밖에. 장항 숲 거리는 초입부터 서로 다른 업종의 상점들이 마을의 울창함을 돕고 있다.

<더 풀>은 뉴욕 스타일 버거를 판매하는데, 가게 뒤쪽에 페인트가 벗겨진 풀장이 실제 존재한다. 산 아래 논과 밭 그리고 바다와 숲 사이로 자리 잡은 풀장의 모양새가 신비하게 잘 어울렸다. <더 풀>과 노란 건물을 나눠 쓰는 <남해스떼>는 남해와 인도식 인사말인 ‘나마스떼’를 언어유희적으로 작명한 가게다. 인도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남해로 귀촌 한 부부의 인도 소품 숍이다.
뉴욕과 인도 다음은 남해였다. <바다항 식당>은 장항 출신의 자매가 운영하는 토속적인 남해 대표 식당이다. 이색적 모드가 시골마을에서 거리감을 느끼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식당이었다. 약 50m 떨어진 곳에는 식사와 쇼핑을 마치고 화룡점정 할 수 있는 카페 <헐스밴드>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록 밴드와 전혀 관련 없는 이 카페는 화덕에서 구워주는 피자(특히, 페퍼로니 피자)와 페루산 원두로 내린 커피가 소문난 메뉴다. 카페 외벽에 콘크리트 벽보다 통유리가 더 넓은 면적을 차지할 정도로 바다 뷰와 논밭 뷰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페였다. 오전에 농사일을 마치면 보통 새참을 기다렸지만, 이 마을에서는 상황이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남해는 대교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섬마을이었다. 남해 읍내가 속한 큰 섬인 남해도는 노량대교와 남해대교가 하동군과 이어졌고, 창선도는 삼천포대교와 연결되었다. 이렇게 큰 두 개의 섬이 남해군의 대부분 말해준다.
남해 시골마을을 돌아보면, 얼핏 제주도와 일맥상통함 점을 발견한다. 돌로 쌓여 있는 건축물 혹은 담벼락, 유난히 화강암 큰 돌을 활용한 지형물을 자주 볼 수 있다.
시멘트와 같은 건축용, 토목용 결합 경화제를 조달 받기 어려운 시절, 남해군은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활용한 구조물을 짓기 시작했다. 바다에서는 석방렴 같은 자연친화적인 어법을 애용했다. 돌담을 주로 반달형으로 쌓아 밀물 때 돌담 안으로 들어온 고기를 썰물 때 돌담 밑부분에 밀어 넣었던 통발로 건져 올리는 방식으로 잡았다.

물자 운반이 어려웠던 일제강점기에 마을에서는 곡식을 저장하는 목적으로 돌창고를 만들었다. 여전히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돌창고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재생을 선보이고 있다.
남해 읍내에서 지족으로 가는 방면에 고인돌 마냥 뜬금없이 돌창고가 나타났다. 돌로 쌓은 사각 이글루 같았다. 시문 마을에 있는 돌창고가 도시재생 프로젝트의 1호 작품이다. 남해의 젊은 인력들의 일자리 창출과 문화 인프라 구축을 위해 이 돌창고가 몇 년 전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지속적인 경제활동 차원에서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가 시그니처 메뉴인 카페가 운영되었고, 나머지 공간은 전시 및 작업실로 문화적 잠재력을 키우고 있었다. 서상 마을에서도 돌창고 2호점이 최근 오픈했다. 남해에는 이런 돌창고가 15개나 더 존재했다. 돌창고는 남해를 말해주는 역사의 일부다. 프로젝트 연대성을 확장하고 남해에 특수성을 전국에 알리는데 널리 활용될 것이다.

우리나라 둘레길 중에 가장 긴 코스는 무엇일까. 정답은 ‘코리아 둘레길’이다. 한반도 가장자리의 길을 모두 연결해 약 4,544km가 되는 대한민국 최장 둘레길이다. 동해안의 해파랑 길, 서해안의 서해랑 길, 남해안의 남파랑 길, DMZ 접경지역의 평화의 길로 크게 나눠지며, 남파랑 길 36~46코스는 남해가 속한 길이다. 남파랑 길은 ‘남쪽의 쪽빛 바다와 함께 걷는 길’이란 의미다.
순전히 한나절을 도보하는데 투자했다. 느리게 지날 때 내 주관도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해 이동면의 원천항을 시작으로 다랭이 마을로 맺음 짓는 42코스를 따라 걸었다. 이 코스는 파도 소리가 앵무새 울음소리와 닮았다고 한 ‘앵강만’을 따라 걷는 길이다.
해안가에서 출발해 앵강다숲을 잠시 가로지르다가 다시 해안을 곁에 두고 걸었다. 화계리에서 마을로 진입해 길현미술관과 미국마을을 거쳤다. 이후 마을 뒷산 길을 오르내리다가 월포해수욕장에서 한숨을 돌렸다. 해변을 바라보며 점심을 해결했다. 해변가에서 유유자적 쉬다가 근처 석교마을에 8년 전에 뿌리내린 소품 숍 B급상점에 들렀다.
월포 방파제에 다다르면서 오늘의 난코스가 시작됐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과 기암괴석을 헤치고 기복이 심한 길을 해결해야 한다. 온몸이 피로에 잠식되었지만, 시선은 해안과 연애 중이었다. 높이 올라갈수록 몸은 힘들지만, 기염을 토할 만한 절경에는 아무 말이나 내뱉기 바빴다. 한 층 한 층 석축을 쌓아 만든 다랭이 논을 오기로 밟아 올라 다랭이마을 상층부를 정복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마지막 남은 기운을 모아 다랭이마을 막걸리를 사러 떠났다.

앵강다숲마을에서 해안 길에 족적을 평행선 긋다가 화계 마을로 들어오면서 보폭을 넓혔다. 폐교인 성남초등학교를 미술체험시설과 전시장으로 용도 변경한 <길현미술관>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미술관 정원에 절 속 큰 바위 불상처럼 큰 사람 형상이 공간을 압도했다. 멀리서 볼 땐 금속 재질인 줄 알았는데, 대나무로 가공한 설치물이었다.

교문 앞에 당도할 때부터 대형견 리트리버가 부르짖기 시작했다. 곧 미술관 안에서 관장님이 나왔다. 현재 코로나 시국 때문에 전시를 진행하지 않고 개인 작업장으로만 사용하신다고 통보하더니 들어가셨다. 다소 머쓱했다. 토요일마다 지역민들의 예술적 역량 증진을 돕는 교육도 조만간 다시 열린다고 하셨다. 참고로 이 미술관은 2010년에 임대해 운영하는 작가님의 이름을 따서 ‘길현’미술관이 되었다.

“독일 마을 말고 미국 마을?”
재차 물었다. 혹시 독일 마을을 미국 마을로 착각한 건 아닌지 말이다. 실제 찾아보니 남해에 미국 마을이 존재했다. 남파랑 길 42코스 중 미국 마을을 지나게 되어 마을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미국 마을은 재미교포들이 모국인 한국에서 노후를 대비해 조성한 마을이다. 길현미술관을 지나 납산과 갓목산의 오솔길을 지나 산속에 지은 미국풍 양식의 대저택 단지가 내려다보였다. 배산임수의 입지적 조건을 따져보면, 명당자리에 마을이 지어졌다. 납산과 호구산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앵강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 거주하는 가족과 인사도 나눴다. 상시 거주를 하지 않은 가정에서는 ‘남해 한 달 살기’나 펜션 혹은 민박으로 운영하였다. 미국 마을은 독일 마을처럼 상업 지구가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베드타운이라 외지인의 방문은 뜸했다. 마을 중턱에 운영하는 카페 한 군데가 전부였다. 마을 입구에 다소 귀여운 자유의 여신상이 서 있었다. 실제 미국의 전통주택 형태로 지은 목조주택이라 숙박 혹은 살아보는 것도 남해의 귀한 경험이라 생각한다.

아일랜드에 살았던 이유를 말할 때, 가장 큰 방점은 ‘B급’이었다. 마이너 한 감성은 꽤 오래 내 영감의 중심이 되었고, 연관 키워드에도 항상 마음이 동했다. 남파랑 길 42코스 해안가를 유유히 걸었다.
시골 정경 그대로 시간이 멈춘 석교마을에서 잠시 길을 이탈했다. 오롯이 <B급상점>이라는 소품가게를 가기 위함이었다. 앱 지도의 도움이 없었으면, 평생 찾지 못했을 곳에 약 8년 전 정착한 가게가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골목길에 새겨진 파란색 이정표는 도착 시점에서 종종대던 발걸음에 자존감을 실어줬다. 그만큼 상점 도착 자체가 큰 자부심이었다.

서울에서 살다가 전혀 연고가 없는 남해에 귀촌을 하게 된 부부의 정착 계기는 남해 여행에서 시작되었단다. 손재주가 좋았다. 그들이 디자인한 에코백과 바로 제작 가능한 실크스크린 티셔츠, 여행 중에 수집한 소품, 독립 서적 까지, 작은 공간에 잘 맞춘 퍼즐처럼 소품들이 놓여 있었다. 이 상점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않아 시간이 소요되는 티셔츠를 주문하는 대신 남해 활자가 새겨진 노트와 비비드 감각이 조화로운 배지를 구매했다. 잠자고 있던 나의 귀촌 감성을 다시 깨운 가게였다.

다랭이 마을은 꽤 유명하다. 해외 언론에서도 찬사를 보냈다. 미국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 봐야 할 곳 3위에 다랭이 마을이 선정되었다. 경사가 유독 가파른 산비탈에 층층마다 돌을 쌓아 개간한 논과 밭은 다랭이마을의 생계수단을 넘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만든 설치 미술이다. 다랭이 마을 절경도 심취할 만 하지만, 이 마을에 오면 마시고 취하는 술이 있다. 바로 <다랭이팜 생막걸리>와 <시골할매 막걸리>다.

다랭이팜 생막걸리는 남해 유기농 쌀을 베이스로 남해의 특산물인 유자, 흑미, 흑마늘을 부재료로 사용해 감미료를 넣지 않고 오랜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쳐 빚었다. 시골할매 막걸리는 막걸리만큼 멸치쌈밥 맛집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위안부 징집을 피해 다랭이 마을로 시집온 어머니가 가양주를 빚었는데, 주변 반응이 좋아 그 아들이 2002년에 본격적으로 식당을 오픈하면서 막걸리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의 이름을 몰라 ‘시골할매’로 통칭해 부르던 게 계기가 되어 지금의 막걸리 작명도 결정했다고 한다. 양조장이 풀어내는 스토리텔링이 달라 취향 별로 아니 이왕 왔으니까 둘 다 마셔보고 썰을 안고 가는 게 어떨까. 두 업체 모두 양조장과 식당을 같이 운영하니 아예 자리 잡고 앉아보자. 경치가 좋아 취하지 않을 수 있으니 이 점은 주의하길 바란다.

보통 마을 이름은 촌스럽다. 하지만 시대를 타지 않고 현시대에도 트렌디한 매력을 드러내는 마을 이름을 종종 만난다. 남해에서도 발견했다. ‘미조 마을’과 ‘설리 마을’. 두 마을은 인접해 있다. ‘미조’에서 풍기는 느낌은 이렇다. 태생적으로 슬픔을 안고 자란 여주인공의 이름. 약간은 단조풍의 음악을 흥얼거리게 만드는 마을. 남해 중에 최남단에 있는 항구를 품은 마을이라 외로움 감정까지 입혀줬다. 미조(彌助)는 미륵이 도운 마을이라는 전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버스 안에서 미조 마을 도작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버스 창문 밖으로 ‘3번 국도와 19번 국도 출발점’이란 석조탑이 보였다. 스쳐 지나갔지만, 선명하게 존재감을 알렸다. 역시 끝은 끝이구나.
정류장에서 내릴 때, 기사님께 읍내 복귀버스 시간을 물었다. 배차시간에 따라 여행 일정이 정해지는 순간이라 여행자 세포가 곤두서 있었다. 여행하면서 불확실성을 ‘몇 개’ 심어두는 편인데, 이를 해결하면서 여행하는 여정을 지향한다. 포인트는 ‘몇 개’라는 점이다. 나머지는 철저한 계획 하에 움직인다. 다행히 넉넉한 시간을 배당받았다. 가장 가고 싶었던 미조 마을의 첫 행선지로 향했다.

수협 옆에 올해 완공된 위판장이 보였다. 마을 크기에 비해 엄청난 위용을 드러냈다. 미조항은 어업이 발달해 현재도 어항이 분주하다. 낚시하는 강태공들이 부둣가에 서 있고, 바다로 향하는 외지 청년들도 다이버 복장으로 그들만의 출정식을 가졌다. 미조항은 근해부터 심해까지 다양한 다이빙 포인트가 있어서 다이버들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MBC 베스트극장의 촬영 장소에 등장했다는 금화 모텔이 특이하게 와 닿았다.

채도가 다른 엷은 계란색 건물이 머지않아 보였다. 외벽 페인트가 까지고 바래진, 거기에 곰팡이까지 벽을 타고 흘러내린 대형 건물 한 부분에 검은색 큰 로고가 붙어 있었다. 여기는 <스페이스 미조>. 내가 미조를 찾은 이유다. 미조항은 일제강점기부터 어업이 활황기여서 부자동네로 통했다.
남해 어업의 거점기지였다가 남해대교가 개통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해상 교통의 역할이 약해지고, 한일어업협정으로 어업까지 큰 타격이 왔다. 그럼에도 미조항의 어업은 지칠 줄 모르게 성장, 유지했다. 아까 봤던 새로운 냉동 창고가 지어지면서 600평 되는 이 창고가 역할을 잃었다.

2022년 4월 8일. 수명을 멈췄던 냉동창고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로운 시간을 부여받았다. 현재 카페와 셀렉숍 그리고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추후 레스토랑 오픈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녹이 슨 냉각용 열교환기가 1층 카페 안을 차지했다. 음료를 주문했다. ‘다래와 해당화 에이드’. 남해 해풍을 맞은 참다래청 에이드에 남해 꽃밭에서 채취한 해당화로 남해를 한 컵 담았다. 이 공간이 나아갈 방향은 오로지 ‘미조 지역과의 연대’라고 밝혔다. 지역 특산물이나 재료를 바탕으로 공간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셀렉숍에는 지역 특산물을 가공한 제품(미조항 멸치로 만든 액젓)과 해양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든 장난감과 바다에 굴러다니면서 깎인 유리조각들을 모아서 만든 글라스 스톤 등 리사이클링 제품이 진열되었다. 넓은 창에서 바라보는 미조항에서 잘 알지 못했던 어부들의 일상이 보였다. 피아노가 놓인 공간은 얼음 수조를 재구성한 공연장이었다. 오랜 세월 비린내를 풍겼던 항구에서 새내기 프로젝트 공간이 생존할 수 있냐는 두고 볼 일이다.
미조항 역사의 기쁨과 애환을 되새기며 아우르려는 움직임에서 긍정의 상생을 엿봤다. 여전히 스페이스 미조 입구의 안과 밖은 어색한 간극이 존재한다. 점점 그 경계가 무뎌지길 소망하는 게 미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 바라는 바다.

약속된 버스 출발 시간보다 40분 일찍 일정을 마쳤다. 마냥 시간을 흘려보내기에는 찾아온 마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마지막 정착지를 부리나케 찾았다.
<카페 본촌 671>은 약 1,000여 종의 유럽풍 그릇을 전시 및 판매하는 남해 유일의 엔틱 카페다. 미조 마을의 끝을 맺을 만한 장소로 나쁘지 않았다. ‘그릇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하며 벼르고 들어갔다가, 축소판 박물관 모드에 기가 눌렸다. 유럽 귀족이 등장하는 명화와 정물화가 벽마다 걸려 있었다.
꽤 오랫동안 그릇을 모았다며 관련 지식도 해박한 사장님. 취미는 성격을 완성하는데, 손님을 응대하는 기술도 탁월하셨다. 마치 유럽 르네상스 시대에 민중들에게 추앙받는 공작부인의 저택에 초대받은 기분이랄까. 수많은 그릇들이 어느 하나 허투루 전시되거나 관리가 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로 정리 및 청결도 면에서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미조 마을의 품격을 한 단계 올려놓은 카페로, 내 기억도 고급스럽게 마무리되었다.

미조 마을만큼 애착을 가졌던 ‘설리 마을’은 이름대로 설레는 기운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인공의 덧입힘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기대하는 건 사치일까. 고도가 높은 국도라서 해안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윽고 나무 사이로 한적한 해수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밝은 회색 톤의 고운 모래가 깔린, 설리 해수욕장의 자태였다. 설리(雪里)는 한자가 읊어주는 대로 백사장이 소복하게 내린 하얀 눈 같다 하여 붙여진 마을이다. 코발트빛 바다는 파도라는 이름으로 큰 부침 없이 백사장에 안착했다가 스스로 부서지며 떠나버렸다.
은빛 도화지 위에 새긴 모래알이 깨질까 봐 발걸음도 조심히 옮겼다. 해안가 끝자락을 붙잡은 며루뚜목산은 병풍처럼 큰 바다가 간섭하지 않게 백사장을 가려줬다. 설리해수욕장 지척에 있는 송정솔바람해수욕장과 상주은모래해수욕장은 인기가 좋아 꽂힌 파라솔이 상당하다. 백사장의 규모도 크고 부대시설도 잘 되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여백의 미와 고요한 쉼의 로망은 설리 해수욕장을 따라올 수가 없었다.

청춘이 물들어왔을 때는 고소공포증이 관계 속에서 결격사유라 자체 판단했었다. 숨기고 버티며 내 안에 결박시켜 또 다른 속앓이를 경험했다. 이젠 당당하게 말한다. 인정하면 편하다는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후 고소공포증은 다름의 영역이었다. 굳이 하늘을 걷고 싶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견뎌보기로 하고 <설리 스카이워크> 전망대에 발을 뻗었다. 남해에서는 물미해안전망대와 함께 관광객이 몰리는 전망대 맛집이다. 이 전망대의 백미는 ‘하늘 그네’다.
인도네시아 휴양지인 발리섬의 명물인 ‘발리섬의 그네’를 남해로 옮겨왔다. 투명 바닥에 서 있는 것조차 슈퍼맨이 간절한데, 저 그네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내 옆에서 막 걸음을 뗀 유아기 생명체가 겁도 없이 투명 강화유리 위를, 심지어 아래를 바라보며 공포감 없이 걷고 있었다.
자존심과 자존감은 이미 저 아래로 던져버린 지 오래지만 괜히 멋쩍었다. 강심장들은 그네에 몸을 싣고 있는 힘껏 하늘을 박차며 극강의 아찔함을 교감하고 있었다. 공포감에 따른 긴장감에 허기를 얻었다. 공포감으로 다이어트가 가능하다고 해도 난 거절할 것이다. 하늘을 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경외감을 표하며 하늘에서 내려왔다.

5월과 6월은 꽃들의 춘추전국시대다. 광장은 전세버스 행렬로 부산했다. 버스에서 내린 어머님과 아버님은 지천에 피어있는 꽃밭 앞에서 포즈를 취하느라 인도자의 외침이 들리지도 않았다. <원예예술촌>은 정원이 있는 집을 꿈꾸는 귀촌인들에게 부러움과 목표의식을 심어주는 곳이다. 입장료를 끊고 세계 각국의 정원이 꾸며진 현장으로 들어갔다.

예술촌의 시작은 이랬다. 원예전문가 중심으로 각자 꾸미고 싶은 정원을 조성한 사유지였다. 개인정원의 콘셉트가 나라 별로 바뀌고 관광객을 끌어모을 제반시설을 갖췄다. 후에 남해군의 투자를 받아 지금의 관광지로 발전하였다. 나라별 정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문마다 특징을 설명한 푯말이 보였다.
1번 일본풍의 화정부터 22번 우리나라풍의 은목서향원까지 세계의 정원이 약 5만 평 안에 운집되어 있었다. 내 취향을 찾아볼까. 원예와 화훼에 큰 조예는 없지만, 직관적인 취향은 분명 존재하니까. 추위를 대비해 지은 핀란드 통나무집과 청동 지붕으로 짓고 민속 인형이 세워져 있는 독일풍의 브레멘 하우스가 베스트였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국가가 취향으로 결론지어졌다.

독일인보다 한국 사람들이 더 잘 아는 독일 마을. 원예예술촌에서 나오면 여권 없이 독일에 입국할 수 있다. 독일 마을은 1960~70년대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들이 번 돈으로 은퇴 후 한국으로 돌아와 정착한 마을이다. 마을의 설립 취지와 역사적 사료를 운운하자면, 현재 독일 마을의 정체성과는 차이가 크다. 그래도 여전히 독일 마을은 여러모로 매력적인 군락이다.
가장 높은 언덕부터 방문 환영문구가 걸린 입구까지 걸어 내려갔다. 언덕에서 내려다 본 주황색 비비드 컬러는 이 동네의 시그니처 장관이다. 남해에서 독일 문화를 집약적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점이 독일마을의 가장 큰 장점이다. 또한 우리나라 근대 격동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을의 역사도 마을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매년 가을, 독일 뮌헨에서는 옥토버페스트 맥주 축제가 열린다. 2013년 엄청난 바가지요금을 감수하고 현장에 도착했다.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맥주 텐트 안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 뮌헨 시내 관광으로 시간을 보냈다. 뮌헨 외곽의 펍에서 마수걸이 맥주를 주문했다. 다들 맥주만 테이블에 놓고 마시는데, 배가 고파서 메뉴판 식사 부분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메뉴 사진이 첨부되었다.
한눈에 들어온 안주는 슈니첼. 그 당시 슈니첼을 몰랐지만, 돈가스와 비슷한 외형에 바로 손을 들었다. 몇 년 후 사진을 정리하다가 그 메뉴가 슈니첼인 걸 알아챘다. 얇게 편 돼지고기는 우리 문화권에 있는 카츠보다는 빵가루의 식감이 없어 덜 바삭하지만 양념된 고기에서 특유의 향이 나는 게 차이점이다.

남해의 한식에 입이 길들여지다가 <당케슈니첼>에서 전환점을 찍었다. 독일 마을에 새로 생긴 인기 좋은 독일식 식당도 있었지만,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했다. 늘 두 명 이상 와서 여러 메뉴를 즐겼는데 오늘은 멋쩍게 혼자다. 슈니첼 하나로 만족하기에는 아쉬워서 헝가리 토마토 스튜인 굴라시까지 주문했다. 베리 소스가 제공되지만, 굴라시 소스에 찍어 먹는 슈니첼이 내 스타일이다.
굴라시는 헝가리 여행 때 오전 해장음식으로 정할 정도로 한국의 육개장과 결이 비슷해 여전히 먹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찾는다. 우리나라 왕돈가스가 연상될 정도로 큰 슈니켈이 나왔다. 레몬즙으로 전체를 둘렀다. 홀그레인 머스타드는 뿌려진 딱 그 정도만 부먹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부분은 굴라시 소스에 찍어 먹었다. 맥주는 맞은편 ‘완벽한 인생’에서 몰아 마시기로 결정했다. 제공된 탑 워터를 마셨다. 굳이 재평가하지 않아도 되는 당케슈니첼에서 한 끼는 만끽했다.

날고 기는 독일 맥주가 범람하는 독일 마을에서 한국 수제 맥주 양조장이 독보적 성장을 보이고 있다. <완벽한 인생> 맥주 브루어리는 바닷가 브루어리를 짓고 싶다는 지금 대표의 의지로 2018년에 문을 열었다. 개성 강한 마니아층보다는 독일 마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맥주를 제공하는 게 이 브루어리의 생각이다. 가장 눈에 들어오는 맥주는 ‘광부의 노래’다. 라이트 한 스타우트 맥주인 광부의 노래는 독일 마을에서 은퇴해 정착한 파독 광부들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지은 이름이다.
남해의 특산물인 흑마늘진액과 오징어 먹물 반죽으로 겉을 입힌 석탄 치킨도 광부를 모티브로 개발한 메뉴다. 홀 내부는 층고가 높고 통유리로 남해바다가 훤히 보였다. 맥주를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췄다. 공간이 넓지만 웨이팅을 감수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케슈니첼에서 맥주를 마시고 와도 충분했을 텐데.

독일 마을 언덕에서 바다 방향으로 늘 바라만 봤던 마을이 있었다. 독일 마을 건축물들이 온통 바다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어서 큰 감정 없이 시야를 떨어뜨려 응시했던 마을은 독일 마을 입구에서 차도를 넘어 바로 시작되었다.
물건 마을은 바다를 품고 있는 어촌마을이다. ‘물건’이란 키워드가 흥미로워 조사해 봤다. 마을 생김새가 선비들이 바둑을 두며 놀고 있는 형태이기 때문에 여자가 수건을 쓸 수 없다 해서 ‘물건’이라 부른다고 하는데 왜 수건을 쓸 수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마을 골목을 유유히 걷는데, 구옥 가운데 신옥이 종종 다른 색 바둑알처럼 눈에 들어왔다. 근처 독일마을의 상권이 물건 마을에도 전달되었을 것이며, 조용히 귀촌 생활을 보내려는 분들이 물건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을까.
물건 마을 바다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50호인 물건 어부 방조림이 조성되어 있었다. 과거 태풍과 염해 등으로부터 마을을 지켜줬다. 마을 크기에 비해 방조림 길이는 1.5km나 됐다.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에 일렁이는 윤슬이 숲 사이로 보여 매력적이었다.

물건 마을에는 명물 빵집이 있다. 남해 빵지순례에 한 축을 담당하는 <르뱅스타 독일빵집> 앞은 승용차와 이용객들로 뒤섞였다. 다행히 포장과 나오는 손님들이라 내가 들어갔을 때는 매장 안이 비었다. 빵을 골랐다. 초여름이지만, 더운 기운이 가시라고 독일에서 크리스마스 때 먹는 슈톨렌 빵과 유자차를 주문했다.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옮겨 앉았다. 바로 눈앞에 비범한 흉상 하나가 보였다. 마침 사장님이 오셔서 그 이야기를 들려줬다.
독일인 루드빅 씨는 독일 마을이 생겼을 때 계셨던 분인데 그의 추천으로 사장님은 고향인 남해로 돌아와 물건마을에 빵집을 차렸다고 한다. 100% 천연 발효종 효모와 유기농 밀가루, 유기농 호밀을 사용하면서 화학첨가물을 일절 넣지 않는 제조 원칙을 지켜 평생 건강한 빵을 제공하는 게 목표라고 하셨다. 슈톨렌을 먹어서가 아니라 카페 인테리어와 소품들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연출했다. 여름보다 겨울을 좋아한다. 잠시 겨울을 보내고 나왔다.

남해 창선도와 남해도는 창선교를 통해 육상 이동이 가능하다. 창선도에서 남해도로 건너면 지족마을이 나온다. ‘지족’은 예전에 바다 가운데로 창선도를 건너갈 때에 ‘발을 멈춘 후 건넌다는 걸 알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지족해협의 물살이 세다는 방증이다. 지족해협에서는 멸치를 주요 수확한다. 죽방렴이라는 전통방식의 어법으로 잡는데, 해안가에 대나무 발들이 엮어놓은 걸 흔히 볼 수 있다.
창선교에서 시내로 들어오면 구거리와 마주한다. 지족 구거리에는 예전부터 상권을 주름잡았던 터줏대감 가게와 귀촌 한 신흥세력이 골고루 분포해 있다. ‘우리식당’ 같은 멸치쌈밥 거리가 전통적 상권이라면, 안쪽 거리에서 싹트고 있는 상점은 지족의 트렌드를 책임지고 있었다. 큰 굴곡을 그리는 역동성보다는 잔잔한 신물결이 바다의 흐름을 바꾸고 있었다.

‘죽방멸치’. 남해 해안가를 걷는데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죽방은 지명이라 넘겨짚었는데, 그 범위가 워낙 큰 거다. 지나가던 동네 주민에게 물으니 “남해 최고의 특산품을 몰러?”라며 핀잔을 받았다. 죽방렴은 남해 멸치를 잡는 포획 어법이다.
지족해협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크며 수심이 10m로 낮은데 물살이 빨라 죽방렴의 구조로 멸치를 가두어 잡기 좋다. 죽방렴은 조선 후기에 발달한 해면어업으로 지족마을에서는 이 전통을 현재까지 이어가고 있었다. 물살이 빠른 물목에 참나무 말목을 V자 형태로 박아 놓은 뒤, 그 사이를 대나무 발로 채운 형태가 죽방렴이다. 지족마을에 오면, 죽방렴 홍보관이 있어서 나처럼 문외한이 들어갔다가 전문가가 되어 나올 수 있다.

누구나 아는 그 ‘하동균’은 아니었다. 그걸 믿고 온 것도 아니었다. 아리산면과 유자탕수육을 필두로 지족 구거리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하동균 중화요리>이다. 아리산면은 대만의 명산인 아리산의 야시장에서 유래된 광동식 해물볶음밥으로 이 식당에서 재해석해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산면은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해 어쩔 수 없이 육짬뽕으로 선회했다. 칼국수 면발이었다. 국물은 황톳빛을 띠어 매운 정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면발은 생각보다 부드러워 입안에 넣자마자 빨려 들어갔다. 짬뽕 속 재료가 다채로워 분석에 들어갔다. 돼지고기, 새우, 오징어, 전복, 단호박, 연근, 새송이버섯, 파, 목이버섯, 배추, 양파, 팽이버섯, 청경채, 숙주나물, 마늘쫑. 신라면 정도의 맵기와 거북한 향신료 맛도 없어서 허들이 높지 않았다.
한 부모의 인솔 하에 일곱 명의 아이들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아리산면이 더 궁금해졌다.

남해 여행 후반부에 나의 동반자와 같은 책을 <아마도책방>에서 구입했다. 여행을 계획하며 지족마을 지도에 가장 먼저 깃발을 꽂았던 책방이다. 그 주인장이 책방을 운영하면서 적은 이야기 꾸러미가 내 여행 중 비대면 말동무였다. 아마도책방은 지족 거리 귀촌 가게 중에서는 고참급이다.
책방 이름은 남해가 좋아서 온 대표님이 남해에 정착하면 ‘아마도’ 책방을 하지 않을까라는 발상에서 지어졌다고 한다. 작은 서점이고 비가 오는데도 서점 안은 인산인해였다. 왜 여행지에서 책방을 찾을까. 여행 중에 골라 읽은 책은 특별하다. 그 여행을 기억할 만한 한 문장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한다. 생명력이 넘치고, 늘 곁에 두면 편안한 기운을 느껴서다. 녹색의 나라 아일랜드를 선택한 중요한 이유도 초록이 포함되어 있어서였다. 광적인 초록 성애자는 아니어도, 초록에 눈이 돌아가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지족마을에 초록을 탐방하러 왔다. 구거리 끄트머리에 <초록스토어>란 소품가게가 목표로 한 곳이다. 이미 기분은 초록색 어닝과 명패로 업 되었다.
이 가게의 모티브가 되었던 키미앤일이 작가의 ‘바게트 호텔’ 그림책의 요소요소가 곳곳에 스며들었다. 문구류, 포스터, 엽서, 책 등의 소품들이 안온한 인테리어와 조화를 이뤘다. 나무 창틀로 짠 창문과 바나나색 소파는 그림책 메타버스 세계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남해 관련 소품들도 진열되어 있어서 그중 하나를 들고 계산대에 다가갔다. 나의 초록 아이템 하나가 더 장착되었다.

초록스토어 내부
<팥파이스>. 네 글자에 재기가 가득했다. 누가 봐도 ‘팥을 파는 가게’다. 유명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업체명도 동시에 상기됐다. 팥에 진심이며, 팥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사장님의 의지까지 읽을 수 있었다. 팥파이스는 국내산 팥과 유기농 밀가루를 사용해 제조한 남해 지족마을의 수제파이 전문점이다.
메뉴판은 담백했다. 팥 파이, 팥빙수, 팥죽 그리고 아메리카노와 우유. 파이 한 판을 포장하는 손님이 의외로 많았다. 팥은 선호하는 종목이 아니라 지갑을 열기 쉽지 않은데, 팥 파이 한 조각은 능동적 지불의사가 가능했다. 파이 조각 속에는 팥과 아몬드가 정갈하게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기본기에 충실한 파이였다. 한 조각을 먹고 한 판을 주문한 다른 손님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해각>은 남해의 출입국사무소 같은 공간이다. 왜냐하면 남해를 여행할 때 필요한 혜택과 꿀팁 등을 남해각에서 알고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남해를 떠나는 마지막 코스로 방문했다. 여정의 선후가 바뀌었지만, 반드시 둘러보고 싶었다.
먼저 ‘판문각’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아서 그런가, 이름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꽤 근엄했다. 심플한 화이트톤의 외관에 굴림체 서체로 ‘남해각’ 상호 간판만이 붙어 있어서 정부 주도형 건축물처럼 보였다. 넓은 통유리창은 남해대교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간 내부에 자연스레 채광이 깃들면서, 시야는 바다 방향으로 방목하게 놔둘 수 있어서 좋았다.

남해각의 역사는 1975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해태제과가 건설한 숙박업소로써, 남해대교가 개통되고 남해를 찾는 수학여행 학생들과 신혼부부들에게 각광받는 여관과 쉼터였다. 현재 남해각에서 전시 중인 관련 영상과 당시 사용했던 소품들로 예전 모습들을 상상할 수 있었다.
한때 호황을 누렸던 여관이 노후화되어 유휴공간으로 방치되다가 최근 ‘남해관광 통합 플랫폼’으로 탈바꿈해 남해 여행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남해 여권을 발행해 해당 지역별 스탬프를 받아오면 남해의 마스코트인 ‘해랑이’를 선물로 받을 수 있었다. 여권과 함께 남해 손거울을 무료로 나눠줬다. 식당이나 숙박업소 등 제휴 관광사업체에 방문하면 가격 할인이 가능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피크닉 여행 소품 대여 서비스에 눈독 들여 보자. 신청서를 쓰고 신분증을 제출하면 최대 7일 동안 남해각에서 제공하는 피크닉 세트의 대여가 가능하다. 생각보다 실한 품목들이 담겨 있었다.

공간 내부에는 남해를 주제로 아티스트들의 전시가 진행 중이다. 남해 방문 계획이 있는 분들은 일단 남해각에 와서 계획을 세워도 늦지 않다. 특별히 정보 취득의 목적이 아니어도 한량스럽게 보내거나 공유 공간이 마련되어 작업하기에도 탁월한 공간이다. 막상 남해를 떠나려니 더 있고 싶게 만드니 이를 어찌할까.

『핫플레이스도 좋지만, 그보다는 ‘롱’ 플레이스가 되고 싶다.』
남해 지족마을 ‘아마도책방’을 운영하는 대표님의 책, ‘남해에서 뭐 해 먹고 사냐 하시면 아마도 책방이겠지요’에 나온 한 구절이다. 그동안 연말에만 염치 없이(?) 남해를 찾다가 본연의 남해를 이제야 조금 깨달았다. 꼭 떠날 때가 되면, 보이는 것들이 있기에 다시 찾아야 하는 이유로 남겨 두는 거다.
남해는 나만이 알고 싶은 곳이 많아 알려주기 싫기보다는 너무나 좋은 곳이니 내 소중한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우선 들었다. 스펙터클한 절경부터 고요하게 자아를 찾기 좋은 장소까지. 찾는 만큼 보이고, 그렇게 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여행지가 남해였던 것 같았다.
특히, 유럽을 사랑하고 동경하며 현재 상황에 안타까워 여행하기 편한 날을 기약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남해는, 스페인에서 식사 전에 술과 곁들여 종류 별로 소량 제공하는 코스 음식인 타파스처럼 유럽의 기억을 조금씩 깨우게 해줬다.
유럽 같은 남해도 좋지만, 남해가 롱런하려면 남해 다운 남해를 개발, 보존해서 남해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데, 그 과정은 다치지 않고 천천히 만들어갔으면 한다.
교정: 박주민